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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5. 15世 〉2. <부정공>노남공휘광운유당지명(蘆南公諱光耘幽堂誌銘)
1. 문헌 목록 〉15. 15世 〉4. <부정공>옥천조공휘광서행록(玉川趙公諱光瑞行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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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정공>고강공휘동운묘갈명(皷岡公諱東耘墓碣銘)
皷岡公諱東耘墓碣銘 公諱東耘字汝起姓趙氏貫玉川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侍中諱璋爲初祖歷二世諱元吉號農隱玉川府院君諡忠獻享武夷院前副正諱瑜號虔谷行通喪之制入 本朝守罔僕之節忠孝雙全 世宗命旌孝閭幷褒其忠享謙川祠左軍司正 贈吏議經筵參贊官諱斯文井邑縣監諱智崑牧民有循良之風築亭講相好之義至曾孫泰仁縣監諱大承與白休庵金甑山爲道義交縣有治蹟歌訓鍊奉事諱珏孝義著世寔高祖以上曾祖通德郎諱義吉仁祖丙子亂赴號召使鄭弘溟義所凛凛氣節誓將北驅幽燕南搗大阪奏凱而還以時事見違痛哭罷歸祖諱時耈考諱維春俱隱德行義見昇平誌妣清州韓氏通政勉吾女利川徐氏命履女公韓氏出也 肅廟乙亥十二月十二日以降之辰也生有異質自齠齡頗知應對進退之節稍長敦行孝悌事親盡誠事兄必恭菽水之歡無時不供埍箎之樂無日不翕日用事爲廉貞安分不以得失介意無所撓奪於世俗以耕讀爲傳世本業勉子弟課日督責及母夫人患候沈重與伯兄殫誠竭力迎醫劑藥醫窮技術竟遭艱哭擗號慕之至見者流涕一三五月遵練祥禫之制又盡情禮於心制實其三年之制然後家君乃再聘矣及歸愛育公伯仲踰於己生公伯仲追竭未盡恭職於先妣之餘誠誠於養志養體又極友義於二弟甞曰昔我先祖井邑公以四昆季序居第二奉保伯兄怡悦二季相好遺風至爲後世矜式今我亦爲四兄弟之第二其於奉兄愛弟之道安得不羹墻於先亭而有忝也哉既和既樂不要相學鄉黨咸嘆其念厥聿修也辛丑正月八日丁外艱哀既踰禮不懈怠極悲憂日必衰絰哭泣於靈座而退省繼母安節焉後居繼母憂亦如前喪而無憾矣甲戌十二月二十日以疾終于寝享年六十墓皷岩洞中崗壬坐原配晋州鄭氏道寬女忌丙子九月二十四日墓祔具石儀三男長重命次斗命新命重命出系伯父光耘斗命一男廷烈新命一男廷直 贈司僕寺正二女昇平朴聖燁漢陽趙時良妻曾玄不盡錄噫公資禀甚美立志不苟從事於爲己實業有德善君子之稱也以今後嗣之蕃衍益驗其福善之攸定也當公之世從叔四友軒維城再從弟華隱儻以文學行誼望重儒門公之制行多有就正資益焉其言行之柯則者昭載於家傳故六世孫炳箕炳黙受父兄命將謀阡刻屬炳寬撰次其事行而於炳寬亦爲本生六代祖也竊有誠感不敢固辭謹按狀而叙之係之以銘曰 烈烈我祖有清醴源克修先德式好季昆孝養繼慈一若所生至譽鄉頌實由天誠循蹈呂訓家庭之學隱行蕫義樵漁耕讀嵂彼皷峰永閟幽宅百世遺存屹屹貞石 從六世孫 炳寬 謹撰 고강공휘동운묘갈명(皷岡公諱東耘墓碣銘) 공의 휘는 동운(東耘)이요, 자는 여기(汝起)며, 옥천 조씨로 건곡 선생 휘 유(瑜)의 후예다. 고의 휘는 유춘(維春)인데 은덕행의(隱德行義)가 승평지(昇平誌)에 보이며, 비는 청주한씨 통정 면오(勉吾)의 딸과 이천서씨 명리(命履)의 딸인데, 공은 한씨출이다. 숙종 을미년(一六九五) 十二월 十二일에 태어난 공은 나면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八세 때부터 응대(應對) 진퇴(進退)하는 예절을 알았고 조금 장성하여서는 효제를 일삼아 어버이를 정성껏 섬기며 형을 대할 때는 반드시 공경하여 마냥 봉양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였고 흙장고 치고 피리로 화답한 「壎箎之樂」 즐거움이 날로 화흡하지 않음이 없고 날마다 하는 일이 청렴하고 곧으며 분수에 맞게 하여 득실(得失)을 따지지 않고 세속에 흔들림이 없이 연마하여 배운 것으로써 대대로 전할 본업을 삼고 자식들을 힘써 가르쳤다. 모부인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백형과 함께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의원을 맞아들여 약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 의원의 의술로도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뜨게되니 울부짖으며 호모하는 공의 모습은 보는 자마다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一월, 三월, 五월 연·상·담(練·祥·禫)을 예제에 따르고 또 정예를 심제(心制)에 다하니 실상 이것이 三년 예제였다. 그 뒤 가군(家君)이 재취하여 우귀해오자 부인은 공의 백중 애육함을 자기 소생보다 더하니 백중도 따라서 힘을 다하여 선비에게 못다한 봉양을 남은 정성으로 뜻을 받들고 몸을 봉양하였으며 두 아우와 우의를 다하였다. 일찌기 가로되 『옛적에 우리 선조 정읍공이 四형제 중에 둘째로 큰형을 받들어 모시고 두 아우를 기쁘게 하여 서로 좋아한 끼친 풍운이 후세에 모범이 되었는데 지금 내가 또 四형제 중에 둘째가 되었으니 형을 받들어 모시고 아우를 사랑한 도리를 어찌 선정을 본받지 않고 욕되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공을 화열(和悦)하고 담락하며 서로 좋아하되 서로 무리를 짖지는 아니하니 향당이 다 그 수신(修身)함에 탄복하였다. 신축년 정월 八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이 예를 지나치고 게으르지 않고 지극히 근심하며 날로 반드시 衰服과 질대로 영위(靈位)에 곡읍하고 물러나 계모에게 문안하였다. 뒤에 계모의 상사 때에도 먼저의 상사 때와 같이하여 남은 여한이 없도록 하였다. 갑술년 十二월 二十日에 병환이 들어 향년 六十세로 정침에서 별세하였다. 묘소는 고암동(皷岩洞) 중강(中崗) 임좌원(壬坐原)에 있고, 배는 진주정씨(晋州鄭氏) 도관(道寬)의 따님이다. 기일은 병자년 九월 二十四일이요, 묘소는 부장이고 석물을 갖추었다. 남은 중명(重命), 두명(斗命), 신명(新命)인데, 중명은 백부에게 출계하였으며, 두명의 一남은 정렬(廷烈)이요, 신명의 一남 정직(廷直)은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며, 二녀는 승평(昇平) 박성엽(朴聖燁), 한양(漢陽) 조시량(趙時良)의 처요, 증현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자품이 매우 아름다와 뜻을 세우는데 있어 구차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실업에 종사하니 사람들은 덕이 있는 착한 군자라 칭송하였다. 이제 후사의 번창으로 더욱 복선(福善)의 정한 바를 증험하겠도다. 공의 대에 이르러 종숙(從叔) 사우헌(四友軒) 유성(維城)과 재종제 화은(華隱) 당(儻)이 문학과 행의로써 선비 사이에 중망이 있고 공의 제행(制行)의 취정자익(就正資益)이 많이 있어 언행의 모범할 자가 가전에 소상히 실려 있으므로 六세손 병기(炳箕), 병묵(炳默)이 부형의 명을 받아 묘도에 새기고자 병관(炳寬)에게 사행을 찬술하라 한다. 그는 병관에게도 六대조가 되므로 진실로 느낀 바 있어 감히 사절하지 못하고 삼가 행장을 참고하여 이와 같이 서술하고 이에 명을 쓴다. 열렬한 우리 할아버지는 맑은 예천의 근원을 가졌도다. 烈烈我祖有清醴源 능히 선덕을 닦아 형제가 서로 좋아하였네. 克修先德式好季昆 효성스러운 계모 봉양, 친어머니와 같이하였네. 孝養繼慈一若所生 온 고을이 칭송한 지극한 명예는 실로 천성에 따름이네. 至譽鄉頌實由天性 여씨 가훈을 따라 밟은 것은 가정 지학일세. 循蹈呂訓家庭之學 숨은 행실과 바른 의리는 초어경독이로다. 隱行蕫義樵漁耕讀 높은 저 북봉우리에 길이 유택이 신기롭네. 嵂彼皷峰永閟幽宅 백 세 유존할 것은 높고높은 곧은 돌일세 百世遺存屹屹貞石 從六世孫 炳寬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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